실리카겔의 M/V(들)에 관해
- 의지와 독립으로서의 M/V
- 의지와 독립으로서의 M/V
EDITOR : 이우빈
‘독립’ 혹은 ‘인디펜던트’의 정의는 무엇인가. 이를테면 독립영화란, 인디밴드란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이고 자유인가. 자본, 제도, 관습, 주류, 기성 따위를 언급하는 방식은 대개 고루하며 모두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질문과 답변의 순환이다. 어쩌면 이러한 정의의 귀속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미립자의 총체가 ‘독립’이란 미확인의 범주일 수도 있겠다. 하나 최근, 다시금 ‘독립’에의 무용한 정의를 해보고 싶은 자극을 느꼈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을, 형용할 수 없는 것을 기어코 말해보려는 욕심에의 기질을 살살 긁은 것은 밴드 실리카겔의 신보 <Machine Boy>

이후 4명의 인간이 거대한 나무를 오른다. 끝을 알 수 없는 높이의 나무 중간 중간엔 운무가 걸쳐 있고 인간들은 암벽 등반하듯 기어코 나무를 오른다. 그런데, 여기 나타난 4명의 인간은 일전의 4인과 행색이 무척 다르다. 일전의 4인이 그 숫자만으로 실리카겔의 표상임을 드러냈다면 이번의 4인은 실제 멤버 개개인의 외모를 따온 듯한 데다가 기타를 메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일전의 4인과 이번 4인은 동일 인물인가. 이것을 명확히 판가름하긴 힘들다. 어쩌면 천사에의 리스닝 착취와 천사의 죽음을 촉매 삼아 일어난 환생의 전후일 수도 있다. 그러니 여기서 천사란 실리카겔 혹은 그들의 음악을 창조해 낸 일종의 역사적 영감으로도 기능하게 된다. 다만 명확한 것은 죽음과 창조, 혹은 헤드셋 선의 끊어짐과 이어짐, 그로 인한 리스닝 착취의 연속이 끝내 단순한 실리카겔의 세계수 등반 움직임으로 귀결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실리카겔의 멤버들에겐 헤드셋 선도,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뉘앙스도 존재하지 않는단 점이 중요하다. 그저 그들은 묵묵히 나무를 오른다. 정리하자면 외부로부터의 계속된 자극이 끝난 세계에서 남은 것이라곤, 그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몸으로 감내한 주체(천사=외부의 영감=영감의 역사)가 죽었거나 혹은 실리카겔이 죽인 후에 남은 것이라곤 밴드의 몸을 책임지고 어딘가로 나아가야만 하는 구도자의 삶이란 뜻이다.

어쩌면 이것이 독립이다. 최근 영화계에서 터져 나온 일련의 자기반영적 영화가 그렇듯 독립이란 것은 결국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자아가 어떻게 반응했느냐, 그리고 그 자극에 먹히지 않고 어떻게 표현으로서 반영하느냐의 과정이다. 이것은 음악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시류다. 동시대 일본 밴드 No Buses가 지난달 발표한 <Eyes>
김한주는, 실리카겔은 무엇을 자각했는가(realize)? 눈 한 개 달린 외계인의 가면을 쓰고 로우파이한 질감의 비디오 속에서 밴드와 함께 무대에 오른다. 그런데 Ato란 이름의 외계인 가면을 쓰고 있는 이는 김한주가 아니라 김춘추다. 그러니까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서 탈피하여 익명화의 세계로 걸어간 뒤, 완전한 개인으로서의 음악-표현을 다른 멤버가 계승한 과정이다. 이내 M/V에 틈입하는 애니메이션 푸티지는 더욱이 <호수의 란슬롯>에 근접한다. 갑옷을 쓴 아토의 등 뒤를 아마 <Mercurial>

한편 이 과정은 실리카겔이라 불리는 내부의 상호작용에서도 일어나는 메커니즘과도 같다. 결국 독립의 대상이 외부이고 주체가 자신이라면 외계, 밴드라는 구심력에서 벗어나려는 멤버들의 원심적 자유의지야말로 진정 인디밴드의 독립을 구성하는 원동력이요 존재의 당위인 것이다. 개체들의 독립을 차치한 채 전체로서의 하나를 외치는 일군의 주류들과 독립 밴드의 가장 다른 점이 바로 이 태도의 차이일 테다. 그렇게 ‘독립’에 관한 서두의 질문은 이 태도의 차이에서 다시금 흐물흐물한 답으로 발현된다. 대신 ‘팀워크가 아닌 팀플레이를 지향’한다는 실리카겔의 명제가 더 적확한 답일지 모르겠다. 이는 곧 다분한 현실주의자의 발로가 아닌 세계 속의 인간, 밴드 속의 멤버로서 주체의 방향성을 관철하고 자신들만의 음악을 지켜가겠다는 존재들의 의지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독립으로서의 삶을 뜻하기 때문이다.